또 공연 보고 왔다. 이번엔 브라질의 대표 스래쉬 메탈 밴드 세풀투라(Sepultura) 공연이었다.
인천 송도에서 열리는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은 상당히 락/메탈에 집중하는 행사였는데, 수년 전에 원래 기획사를 밀어내고 인천시가 새로운 기획사를 앞세운 후로 많이 말랑해졌다. 이후 그닥 관심이 없었는데, 올해 어찌된 일인지 무려 '세풀투라'가 오기로 했다.
쌍팔년 즈음에 지구음반으로 통해 해외 메탈 밴드 음반들이 라이센스로 엄청 발매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세풀투라의 'Beneath the Remains'란 앨범이 발매되었다. 세풀투라는 막스(G,V) & 이고르(D) 카발레라 형제와 안드레아스 키세르(G), 파울로 주니어(B)로 시작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3집 'Beneath the Remains' 앨범 이후에 'Arise', 'Chaos A.D', 'Roots'까지 90년대 중반까지 꽤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사실 이들이 큰 성공을 이루면서 브라질의 토속 리듬을 음악에 담는 시도를 조금씩 했는데, 당시 그냥 주구장창 달리는 스래쉬 메탈만 듣던 나는 Chaos A.D 앨범부터 살짝 이질감(?)을 느끼다가 Roots부터는 잘 안 들었다. 그러다가, 가장 격인 막스 카발레라가 탈퇴하고, 10년 후엔 동생 이고르 카발레라도 탈퇴한다. 막스 빠진 세풀투라는 세풀투라가 아니라는 예전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고르까지 탈퇴하고는 많은 팬들이 멀어졌다. 나 또한 멀어진 팬 중에 하나였다.
그래도, 이들은 새로운 보컬 데릭 그린(일명 흑형)과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반면, 세풀투라를 탈퇴한 막스 카발레라는 다른 밴드 몇 개를 해오면서도, 계속 자기가 세풀투라의 정통 계승자인 듯한 말을 해오면서 밴드와 갈등이 좀 있는 것 같았다. 가장이 나간 집안을 안드레아스와 파울로 두 형제가 꾸준히 지켜왔는데, 집나간 가장이 나가서 딴 소리 계속 해대는 게 힘들었는지 세풀투라의 40주년을 맞아 마지막 투어를 끝으로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어떻게 섭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시아 투어도 아닌데 이 투어의 일환으로 펜타포트에 온다고 한다. 처음 라인업 공개되었을 때 내 눈을 의심했다니까.
사실, 세풀투라의 내한공연이 처음은 아니다. 2001년 여름에 동대문 운동장에서 '메탈페스트 2001'라는 진짜 센 메탈 밴드들의 연합 공연이 있었다. 무려 Slayer, Sepultura, Machine Head, Arch Enemy, Vision of Disorder 등 2001년 당시로도 굉장한 인지도의 메탈 밴드의 연합 공연이었는데, 평일(목) 오후 6시 공연이라는 것과 홍보 부족으로 5-600명 정도의 소규모 관객으로 굉장히 허무하게 진행된 공연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 밴드들이 내한할 일은 없을 거라 할 정도로 우리나라 락/메탈 공연 역사에 큰 흑역사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아치에너미는 이후에도 여러번 성공적인 내한 공연을 한 바 있다.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세풀투라가 내한 공연을 한다니!
펜타포트 락페 시간표가 나왔는데, 세풀투라가 가장 큰 무대가 아닌 제 2 무대의 마지막 시간으로 1시간 할당을 받았다. 제 1 무대의 헤드라이너는 잔나비...
펜타포트 시간표에 안타까움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가운데, 락페 다음 날 서울 단독 공연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다. 공연장은 신촌에 있는 예스24 원더로크 홀이라고 처음 듣는 곳이다. 스탠딩일 때 600석 정도 되는 곳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쌍팔 시절 메탈 공연은 관객 몰이가 잘 안 되는 편이라 텅텅 빈 채로 공연을 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솔직히 나도 별로 볼 생각이 없었으니...
그런데, 펜타포트에서의 영상이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면서 상황이 반전되는 것 같다. 멤버들과 스탭들도 인스타그램에 스토리와 포스트를 올리며 대단히 분위기가 고무된 느낌이었다. 무대에 누가 올라오든 잘 노는 우리나라 락페 관객들과 세풀투라의 무대가 합쳐지니 여느 해외 락페 못지 않는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볼까 말까 하던 나도 가서 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다.
월요일 옷(반바지에 아이언메이든 티셔츠) 갈아 입고 조금 일찍 퇴근하고 신촌으로 갔다. 신촌 역 옆에 있는 CGV 지하에 있는 공연장이네. 현매로 표를 샀는데, 입장 번호가 427번이다. 생각보다 관객이 많은 것 같다.
입장 전에 줄을 서는데, 내 뒤로도 많은 관객이 있었다. 특히나 젊은 관객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펜타포트의 효과가 아니었나 싶다. 공연 전에 페북을 통해 알게 된 모형과 메탈을 좋아하는 지인과 오래간만에 만나 인사나눴다. 브라질 사람들도 꽤 온 것 같다.
공연장은 플로어가 낮은 4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난 2층에 자리 잡으려다 키가 큰 관객들이 많아서 3층 중앙에 적당히 자리 잡았다. 아티스트를 살짝 내려다 보는 정도인 것 같다. 바로 뒤에는 사운드 콘솔이 위치하고 있고.
공연 전에 반헤일런 음악과 메가데스 음악이 나왔는데, 관객들이 메가데스를 연호해서 좀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무대는 중앙 뒤에 드럼이 조금 높여져서 세팅되어 있고, 오른편이 기타, 왼편이 베이스이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공연용 악기 렌탈과 무대 감독하는 친구가 있는데, 펜타포트 측에서 메사부기 기타 헤드 앰프를 대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댄다. 누가 쓸 거냐 물어봤더니 세풀투라가 쓸 거라 해서 얼른 빌려줬대. 🤣 그 앰프가 저 오른쪽 끝에 보인다. 이 친구가 세풀투라의 안드레아스 키세르를 엄청 좋아하더라구. 앰프 빌려간 업체한테 앰프에 안드레아스 사인 받아달라고 요청했다는데 사인 받았나 모르겠네. ㅎㅎ
아, 세풀투라의 이번 투어의 라인업이다.
- 파울로 주니어 (Paulo Jr.) – bass (1984–)
- 안드레아스 키세르 (Andreas Kisser) – lead guitar, backing vocals (1987–)
- 데릭 그린 (Derrick Green) – lead vocals (1997–)
- 그레이슨 네크루트만 (Greyson Nekrutman) – drums (2024–)
기타리스트 안드레아스 키세르는 수년 전에 좀 화제가 되었던 BOSS사의 컴팩트 기타 앰프 광고에 아들과 함께 나왔던 적도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H_BPzEc84Z8
그리고, 드러머가 매우 흥미로운데...
유튜브에 Drumeo란 캐나다를 기반으로 하는 드럼 채널이 있는데, 유명한 드러머를 초청해서 대표곡을 연주 및 설명하기도 하고, 그 드러머가 전혀 모르는 곡을 드럼 채널을 빼고 들려주고는 드러머가 스스로 어울리는 연주를 만들어 채우게 하고 나중에 원곡과 비교하는 걸 한다. 이게 되게 재미있다. 메가데스의 현재 드러머 편도 재밌고, RHCP의 채드 스미스 편은 기가 막히다. 여기서, 현재의 세풀투라 드러머인 그레이슨이 나온 걸 본 적이 있다. 이 친구가 2002년 생 미국인인데, 주전공은 재즈/빅밴드 스타일이라는데, Drumeo에서 'Sleep Token'이란 메탈 밴드 곡을 연주하게 된다. 여기서 자기 맘에 들 때까지 수차례 시도하고, 그 연주도 상당히 훌륭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Rc7sGn5reE
그러더니, 2023년에 베테랑 메탈 밴드인 'Sucidal Tendencies'에 드러머로 합류하게 된다는 발표가 나더니, 이내 2024년에 세풀투라 고별 투어의 정식 드러머로 발표가 되었다.
공연은 8시 6분쯤에 불이 꺼지고, 오프닝 음악과 함께 시작한 것 같다.
이번 셋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01. Refuse / Resist - Chaos A.D. (1993)
02. Territory - Chaos A.D. (1993)
03. Propaganda - Chaos A.D. (1993)
04. Phantom Self - Machine Messiah (2018)
05. Dusted - Roots (1996)
06. Attitude - Roots (1996)
07. Spit - Roots (1996)
08. Kairos - Kairos (2011)
09. Means to an End - Quadra (2020)
10. Convicted in Life - Dante XXI (2006)
11. Guardians of Earth - Quadra (2020)
12. Mind War - Roorback (2003)
13. False - Dante XXI (2006)
14. Choke - Against (1998)
15. Escape to the Void - Schizophrenia (1987)
16. Kaiowas - Chaos A.D. (1993)
17. Dead Embryonic Cells - Arise (1991)
18. Biotech is Godzilla - Chaos A.D. (1993)
19. Agony of Defeat - Quadra (2020)
20. Troops of Doom - Morbid Visions (1986)
21. Inner Self - Beneath The Remains (1989)
22. Arise - Arise (1991)
[Encore]
23. Ratamahatta - Roots (1996)
24. Roots Bloody Roots - Roots (1996)
(애플 뮤직에 이 셋리스트로 재생 목록을 만들어놨다)
미리 확인한 최근 투어의 단독 공연 셋리스트와 한 곡 빼고 같았다. 셋리스트를 보면 초기 앨범부터 최근 앨범까지 가능하면 거의 다 훑으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복잡한 드럼으로 시작하는 Refuse/Resist 나오면서 공연장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1997년부터 보컬을 하고 있는 데릭을 싫어하는 옛날 팬들이 없지 않은데, 어후... 거구의 흑형이 무대 중앙에서 노래하는 모습은 위압감이 상당했다. 안드레아스의 기타와 파울로의 베이스, 그리고 그레이슨의 드럼은 이게 3인조의 연주인가 싶을 정도로 꽉 차고 탄탄했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이들 음악은 직선적인 스래쉬 메탈이었는데, 라이브에서 쭉~ 들으니 곡에 변화가 매우 많고 그루브 감이 엄청나다.
중간에 멘트하면서 전날 페스티벌이 대단했다면서 오늘도 기대된다는 얘기를 했고, 새로 합류한 그레이슨 소개도 따로 했다. 생각보다 관객들 중에 그레이슨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전날 공연보다 많은 곡을 준비했다고 해서, 이번 투어의 다른 공연처럼 24곡을 예상할 수 있었다.
곡이 바뀔 때마다 무대 뒷면에 디스플레이에 다른 영상이 나온다. 이 정도 규모 공연장에서 무대 뒤에 스크린 또는 디스플레이까지 있는 곳을 급하게 수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고별 투어라 그런지 준비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 멘트하면서 관객들 사이에서 브라질 국기 보고 반가워 하며 뭐라뭐라 하기도 하고, 분위기 좋다.
예습을 해도 아무래도 아주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환호성 지르면서 헤드뱅잉하며 즐기기엔 충분히 곡과 연주가 좋았고 재미있었다.
브라질의 전통 리듬 어쩌구저쩌구 얘기하면서 안드레아스가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고 데릭이 무대 중앙에서 퍼커션을 치기 시작한 'Kaiowas'란 곡에서는 곡이 진행되면서 스탭? 테크? 두 명이 무대에 더 올라오면서 드러머를 제외한 멤버 셋과 추가 두 명이 앞에서 퍼커션 + 드럼까지 해서 난데없이 난타 공연 같은 퍼포먼스도 있었다.
곡들이 줄줄이 매력적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내가 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던 'Beneath the Remains'에 수록된 'Inner Self'란 곡과 'Arise'가 이어지는데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최근에 공연장에서 이렇게 미친 듯이 뛰고 소리 치고 헤드뱅잉한 게 얼마만인가 싶을만큼 열심히 놀았다. (마치 공연 되게 오래간만에 본 사람 같네. 7월 말까지 8회의 공연과 1회의 페스티벌 봄 😆)
공연 보면서 영상은 잘 안 찍는데 이 한 곡은 찍어봤다.
35년 만에 이 곡을 직접 공연에서 보다니. 진짜 감격스러웠다
기타리스트 안드레아스는 정말 기타 정말 잘 친다. 왜 이들이 카발레라 형제 없어도 20년 넘게 (막스 탈퇴 후 거의 30년) 활동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다.
베이시스트 파울로는 딱 자기 자리에서 큰 위치 이동없이 묵묵히 연주했다. 안드레아스와 함께 둘이서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엄청났다.
보컬 데릭은 24곡이나 되는 곡들을 긁어대는 데 목소리에 힘이 대단했다. 적절히 관객들 호응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다. 데릭 이후에 세풀투라를 멀리 했는데, 호감도 급상승!
신참 드러머 그레이슨은 정말 공연 보는 내내 "대단하다!" "미친 거 같아!" 이런 감탄사를 몇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른다. 변화 무쌍한 드럼 연주와 그루브, 파워, 스피드 어느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게 없었다.
앙코르를 연호하면서는 관객들이 박자에 맞춰 바닥을 발로 구르기도 했는데, 1998년의 메탈리카 첫 내한 공연이 생각나더라. 앙코르 곡으로는 리드미컬한 드럼 위에 랩음악에 가까울 정도로 가사를 쏟아내는 'Ratamahatta'이었는데, 'Anthrax' 공연에서 앙코르로 했던 'I'm the Man'이란 곡이 생각나네. ㅎㅎ 바로 이어서 이 날의 마지막 곡인 'Roots, Bloody Roots'를 했는데, 이 곡이 이리 신나는 곡이었던가? 정말 관객들 모두 방방 뛰면서 "Root, Bloody Roots"를 목터져라 외치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약 2시간의 공연이 끝났다. 관객을 배경으로 인증샷 찍고는 각자 관객들과 인사 나누면서 공연이 끝났다.
멤버들도 매우 기분 좋은 표정이었고,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표정에서 대단한 만족감을 볼 수 있었다. 칼발레라 형제가 없음에 대한 우려 따위는 전혀 없는 속이 후련한 통쾌한 스래쉬 메탈의 두 시간이었다. 이들이 가장 없이도 그 오랜 시절을 세풀투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해 올 수 있었는지 실력으로 보여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우리나라 베테랑 스래쉬 메탈 밴드인 마하트마 멤버들도 보인다. 간만에 정통 메탈 공연장에서 이런 많은 관객이 함께 했네. 밖으로 나와서 시작 전에 만난 지인을 만났는데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땀으로 폭삭 젖었다. ㅎㅎ 밴드 활동도 하던 친구인데 세풀투라로 이 장르를 좋아하게 되었다던데 진짜 신나게 논 모습이었다.
이들은 다음 날 유럽을 경유해서 브라질로 갔다. 순전히 한국 공연 만을 위해 온 게 맞네. 하. 인스타 보니까 공연 끝나고 기다린 관객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그랬나 보다.
2001년의 처절했던 메탈 페스트의 기억을 갖고 있었을 당시의 세풀투라 밴드나 팬들 모두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을 것이다.
이 투어가 그들을 세풀투라로 볼 수 있는 마지막이라 하니 많이 안타깝다. 여전히 훌륭한 연주와 힘이 있어서 더욱 더 아쉽다. 그래도, 그들의 에너지를 온 몸으로 느낀 그 공간과 시간은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 공연은 전주 얼티밋 뮤직 페스티벌 2일차 관람이다!
안드레아스가 멋있으니까 몇 장 더 ㅎㅎ